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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용조건 이란

    1) 제1유형 : 출처표시
    - 출처표시
    -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

    2) 제2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출처표시
    - 비상업적 이용만 가능
    -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

    3) 제3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출처표시
    -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금지

    4)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
    - 출처표시
    - 비상업적 이용만 가능
    -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금지

    5) 만료공공저작물 : 이용조건(출처표시 포함)이 없이 자유롭게 이용
    - 이용조건(출처표시 포함) 없음

    조선고적조사보고 : 대보면제7호분 (도면)

    이미지

    조선고적조사보고 : 대보면제7호분 (도면)_1번 사진
    조선고적조사보고 : 대보면제7호분 (도면)_2번 사진
    조선고적조사보고 : 대보면제7호분 (도면)_3번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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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립문화재연구원 #문화유산연구지식포털 #조선고적조사보고 #일제강점기 #연구자료
    제공기관
    • · 촬영연도 : 1937
    • · 촬영기관 : 국립문화유산연구원
    • · 소장기관 : 국립문화유산연구원
    공공누리 유형

    국립문화유산연구원이(가) 보유한 본 저작물은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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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물 정보
    저작물 설명

    제5호분의 서쪽에 흘립(屹立)하고 있는 큰 고분이다. 분구의 높이는 남쪽 가장 낮은 곳에서 재면 25척에 이르지만 북쪽은 지반이 높기 때문에 10척 정도 준다. 대략 방대형을 이루고 있고 그 직경은 동서? 90척, 남북쪽 110척 남짓이다. 현재의 분정(墳頂)은 멀리 떨어진 북쪽에 치우쳐 있다. 봉토는 여기저기 깎여 남쪽 또한 오목한 형태(凹形)로 함몰되었다. 도굴의 흔적이 역력한데 벽화의 잔존에 만일의 기대를 가지고 조사에 착수하였다. 그런데 그 결과 봉토 안에 나란히 있는 동서쪽 1쌍의 곽실을 주체로 하는 구조인 것을 알았을 뿐 벽화는 없고 유물 또한 2개의 쇠못을 발견했을 뿐 얻을 것이 없었다. 그 회반죽 없이 쌓아올려 연도 입구를 막고 있는 돌 속에서 단란(斷爛)한 『평양매일신문(平壤每日新聞)』의 작은 종이 조각을 얻었는데 그 기사 중에 「미쓰야(三矢) 경무국장(警務局長) 국경의 방비」「구참(口參)년 10월 20일」등의 문자가 있다. 10년 전에 평양에서 와서 발굴한 자가 있었다는 마을 사람들의 말에 맞추어 총독부 치하에 도굴이 행해진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있었다는 것은 사적 보존의 견지에서 유감을 느낀다. 고분의 주체인 동실(東室)과 서실(西室)은 연도 입구의 미석(楣石) 중앙에서 14척 3촌 떨어진 곳에 있고 양자가 서로 늘어서 있다. 그 상면(床面)은 양쪽 다 분정(墳頂)에서 17척 6촌 아래쪽에 있다. 마침 분구의 서쪽 기슭 중앙부에 있는 밭의 면상(面上)과 일치한다. 둘 다 정남쪽에서 약 20° 서쪽에 치우쳐 입을 열고 있고 본래 계획적으로 하나의 고분의 주체로서 만들어진 것을 나타낸다. 동쪽 곽실, 현실의 크기는 북쪽 벽 6척 3촌 5분, 동쪽 벽 8척 3촌의 구형(矩形)이다.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는 약 8척 3촌이고 그 중 네 벽은 높이 5척 1촌 정도로 위쪽이 앞으로 쓰러져 있다. 위에 1단(段)의 선반받침과 2중의 삼각형 선반받침을 구석구석에서 대고 가장 위에 사각형 천장을 얹은 구조는 일반적으로 보면 다른 곳이 없다. 실내의 회반죽은 흙이 녹슬어 있기 때문에 오손이 많다. 돌을 쌓은 법과 회반죽을 바른 법 둘 다 조잡하고 울퉁불퉁하여 융와(隆?)가 심하다. 한군데도 승묵(繩墨)에 해당하는 곳은 없다. 바닥은 할률(割栗) 위에 1촌 5분 두께의 목탄층을 놓고 표면 1촌 두께로 회반죽을 바른 것인데 이 또한 높고 낮음이 많고 게다가 지금은 대부분 파괴되었다. 바닥 위에는 동서쪽의 벽을 따라 각 1개의 관대(棺臺)를 놓았다. 대석(臺石)은 거친 면의 화강암석으로 서쪽은 길이 6척 8촌 5분, 폭 2척 6촌이다. 동쪽의 길이는 좀 길지만 폭은 2촌으로 좁다. 두께는 둘 다 부정(不定)하고 3촌 5분 내지 1촌 5분 사이에 있다. 각각 푸른 돌의 각형(角形) 다리 4개로 지탱한다. 입구는 남쪽 벽 중앙에서 약간 서쪽에 편재하고 폭은 3척 3촌 8분, 높이 5척 5촌의 방형을 이루고 있으며 연도로 통한다. 이 연도는 길이 12척 7촌으로 그 폭은 입구와 동일하고 넓이는 좁지 않다.

    저작물 설명
    제5호분의 서쪽에 흘립(屹立)하고 있는 큰 고분이다. 분구의 높이는 남쪽 가장 낮은 곳에서 재면 25척에 이르지만 북쪽은 지반이 높기 때문에 10척 정도 준다. 대략 방대형을 이루고 있고 그 직경은 동서? 90척, 남북쪽 110척 남짓이다. 현재의 분정(墳頂)은 멀리 떨어진 북쪽에 치우쳐 있다. 봉토는 여기저기 깎여 남쪽 또한 오목한 형태(凹形)로 함몰되었다. 도굴의 흔적이 역력한데 벽화의 잔존에 만일의 기대를 가지고 조사에 착수하였다. 그런데 그 결과 봉토 안에 나란히 있는 동서쪽 1쌍의 곽실을 주체로 하는 구조인 것을 알았을 뿐 벽화는 없고 유물 또한 2개의 쇠못을 발견했을 뿐 얻을 것이 없었다. 그 회반죽 없이 쌓아올려 연도 입구를 막고 있는 돌 속에서 단란(斷爛)한 『평양매일신문(平壤每日新聞)』의 작은 종이 조각을 얻었는데 그 기사 중에 「미쓰야(三矢) 경무국장(警務局長) 국경의 방비」「구참(口參)년 10월 20일」등의 문자가 있다. 10년 전에 평양에서 와서 발굴한 자가 있었다는 마을 사람들의 말에 맞추어 총독부 치하에 도굴이 행해진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 있었다는 것은 사적 보존의 견지에서 유감을 느낀다. 고분의 주체인 동실(東室)과 서실(西室)은 연도 입구의 미석(楣石) 중앙에서 14척 3촌 떨어진 곳에 있고 양자가 서로 늘어서 있다. 그 상면(床面)은 양쪽 다 분정(墳頂)에서 17척 6촌 아래쪽에 있다. 마침 분구의 서쪽 기슭 중앙부에 있는 밭의 면상(面上)과 일치한다. 둘 다 정남쪽에서 약 20° 서쪽에 치우쳐 입을 열고 있고 본래 계획적으로 하나의 고분의 주체로서 만들어진 것을 나타낸다. 동쪽 곽실, 현실의 크기는 북쪽 벽 6척 3촌 5분, 동쪽 벽 8척 3촌의 구형(矩形)이다. 바닥에서 천장까지의 높이는 약 8척 3촌이고 그 중 네 벽은 높이 5척 1촌 정도로 위쪽이 앞으로 쓰러져 있다. 위에 1단(段)의 선반받침과 2중의 삼각형 선반받침을 구석구석에서 대고 가장 위에 사각형 천장을 얹은 구조는 일반적으로 보면 다른 곳이 없다. 실내의 회반죽은 흙이 녹슬어 있기 때문에 오손이 많다. 돌을 쌓은 법과 회반죽을 바른 법 둘 다 조잡하고 울퉁불퉁하여 융와(隆?)가 심하다. 한군데도 승묵(繩墨)에 해당하는 곳은 없다. 바닥은 할률(割栗) 위에 1촌 5분 두께의 목탄층을 놓고 표면 1촌 두께로 회반죽을 바른 것인데 이 또한 높고 낮음이 많고 게다가 지금은 대부분 파괴되었다. 바닥 위에는 동서쪽의 벽을 따라 각 1개의 관대(棺臺)를 놓았다. 대석(臺石)은 거친 면의 화강암석으로 서쪽은 길이 6척 8촌 5분, 폭 2척 6촌이다. 동쪽의 길이는 좀 길지만 폭은 2촌으로 좁다. 두께는 둘 다 부정(不定)하고 3촌 5분 내지 1촌 5분 사이에 있다. 각각 푸른 돌의 각형(角形) 다리 4개로 지탱한다. 입구는 남쪽 벽 중앙에서 약간 서쪽에 편재하고 폭은 3척 3촌 8분, 높이 5척 5촌의 방형을 이루고 있으며 연도로 통한다. 이 연도는 길이 12척 7촌으로 그 폭은 입구와 동일하고 넓이는 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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