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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제1유형 : 출처표시
    - 출처표시
    -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

    2) 제2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출처표시
    - 비상업적 이용만 가능
    -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가능

    3) 제3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출처표시
    - 상업적, 비상업적 이용가능
    -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금지

    4) 제4유형 : 출처표시 + 상업적 이용금지 + 변경금지
    - 출처표시
    - 비상업적 이용만 가능
    - 변형 등 2차적 저작물 작성 금지

    5) 만료공공저작물 : 이용조건(출처표시 포함)이 없이 자유롭게 이용
    - 이용조건(출처표시 포함) 없음

    육군박물관_강위빙 시호서경완의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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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련태그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고문서 #사헌부시호서경 #강위빙 시호서경완의 문서
    제공기관
    • · 촬영연도 :
    • · 촬영기관 :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 · 소장기관 : 육군사관학교 육군박물관
    공공누리 유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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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작물 정보
    저작물 설명

    완의(完義)는 서로 다른 주체 또는 사회 기구에서 특정한 의사 결정 과정을 거친 후 그 합의된 의결을 반영하여 생산한 조선시대 문서의 한 형식이다. 이 문서는 성격상 서경(署經, 국왕의 명령에 대한 신하의 동의 제도) 완의 문서라고 할 수 있는데, 이조판서 강위빙(姜渭聘, 1569~1637)에게 충렬공(忠烈公)의 시호(諡號)를 내리기 위해[贈諡] 사간원(司諫院)에서 그 적절성 여부를 심의한 내용이다. 시호란 대신이 죽었을 때 그의 일생을 평가하는 별도의 이름이다. 시호를 받기 위해서는 우선 해당인의 행적을 기록한 시장(諡狀)을 작성하여 예조에 제출하고 예조는 시장을 근거로 3개의 시호 후보를 결정하는데 이를 시호망(諡號望)이라 하였다. 이를 토대로 3개의 시호 후보를 시호단자라는 문서로 국왕에게 보고하여 그 중 하나를 낙점한다. 그 후 낙점된 시호가 과연 적절한지를 두고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각각 2명의 관원을 내어 검토하는 것을 서경완의라고 하였다. 이 문서에는 정5품의 사간원 헌납(獻納)과 정6품의 사간원 정언(正言)의 수결(手決, 서명)이 기재되어 있으며, "난리에 임하여 나라를 잊지 않는 것을 "충(忠)"이라 하고, 강건함으로 적을 이겨 공을 이룸을 "열(烈)"이라고 한다"라고 하여 시호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육군박물관에는 이 문서 외에도 사헌부에서 동일인의 같은 내용을 심의한 서경완의문서가 소장되어 있다. 강위빙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가서 봉림대군(鳳林大君), 인평대군(麟坪大君) 등을 배종, 호위하였다.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적에게 포로가 되어 항복을 강요당했으나, “내 목은 끊을 수 있으나 너희들 앞에 무릎은 꿇을 수 없다” 하여 끝내 순절하였다. 1657년(효종 8)에 좌승지에 추증되고, 고향인 강화에 충신정문(忠臣旌門)이 세워졌으며 후에 강화의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저작물 설명
    완의(完義)는 서로 다른 주체 또는 사회 기구에서 특정한 의사 결정 과정을 거친 후 그 합의된 의결을 반영하여 생산한 조선시대 문서의 한 형식이다. 이 문서는 성격상 서경(署經, 국왕의 명령에 대한 신하의 동의 제도) 완의 문서라고 할 수 있는데, 이조판서 강위빙(姜渭聘, 1569~1637)에게 충렬공(忠烈公)의 시호(諡號)를 내리기 위해[贈諡] 사간원(司諫院)에서 그 적절성 여부를 심의한 내용이다. 시호란 대신이 죽었을 때 그의 일생을 평가하는 별도의 이름이다. 시호를 받기 위해서는 우선 해당인의 행적을 기록한 시장(諡狀)을 작성하여 예조에 제출하고 예조는 시장을 근거로 3개의 시호 후보를 결정하는데 이를 시호망(諡號望)이라 하였다. 이를 토대로 3개의 시호 후보를 시호단자라는 문서로 국왕에게 보고하여 그 중 하나를 낙점한다. 그 후 낙점된 시호가 과연 적절한지를 두고 사헌부와 사간원에서 각각 2명의 관원을 내어 검토하는 것을 서경완의라고 하였다. 이 문서에는 정5품의 사간원 헌납(獻納)과 정6품의 사간원 정언(正言)의 수결(手決, 서명)이 기재되어 있으며, "난리에 임하여 나라를 잊지 않는 것을 "충(忠)"이라 하고, 강건함으로 적을 이겨 공을 이룸을 "열(烈)"이라고 한다"라고 하여 시호의 의미를 설명하였다. 육군박물관에는 이 문서 외에도 사헌부에서 동일인의 같은 내용을 심의한 서경완의문서가 소장되어 있다. 강위빙은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가서 봉림대군(鳳林大君), 인평대군(麟坪大君) 등을 배종, 호위하였다. 이듬해 강화성이 함락되자 적에게 포로가 되어 항복을 강요당했으나, “내 목은 끊을 수 있으나 너희들 앞에 무릎은 꿇을 수 없다” 하여 끝내 순절하였다. 1657년(효종 8)에 좌승지에 추증되고, 고향인 강화에 충신정문(忠臣旌門)이 세워졌으며 후에 강화의 충렬사에 제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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