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비암사 극락보전_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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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암사는 마곡사의 말사로 현재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에 위치하고 있다. 비암사(碑岩寺)는 통일신라 도선(道詵)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오고 그 외에도 여러 창건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비암사 출토 유물(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 국보, 673년 제작추정) 이나 기축명아미타불비상(己丑銘阿彌陀佛碑像, 보물, 689년 제작추정)이 확인되었고, 지금까지 이 고장에서는 비암사를 ‘삼한고찰(三韓古刹)’로 부르고 있어 이 사찰의 창건을 고대로 거슬러 볼 수 있다. 17세기 전란 뒤의 시대상이 반영된 측면 2칸형 불전 조선시대 다포계 불전의 평면은 정면 3칸×측면 3칸형이 주류를 이룬 데 비해서 비암사 극락보전은 측면 2칸형 불전이다. 측면 2칸형 불전은 3칸×3칸 불전에 비해서는 사례가 적지만 임진왜란 이후 급속도로 보급되어 3칸×3칸에 이어 두 번째 비율로 남아 있다. 또한 고주를 뒤로 물려 설치하고 후불벽을 세워 전면의 예불공간을 확보한 방식에 있어서는 3칸×3칸 불전과 다름없지만 측면 1칸을 축소하였기 때문에 전면 예불공간이 협소하다. 이처럼 비암사 극락보전의 측면 2칸형은 전란 이후의 사찰경제가 축소된 시대상이 반영된 계획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내부는 고주와 후불벽을 설치한 방식을 고수하고, 분포면에서도 충남·세종시에 각각 1채만 남아 있어 지역에서도 흔치 않은 사례로 손꼽힌다. 17세기 공포구성의 사례 공포는 내외 3출목으로 구성하였다. 보통 조선중기에 들면 내외 출목수에 변화가 일어나서 내부 출목이 외부보다 늘어나는 경향이 나타난다. 게다가 측면 2칸형 불전 사례를 봐도 팔작집은 일반적인 출목수 변화를 따라 내부 출목수가 늘어나는 반면 극락보전은 내외 출목을 동일하게 짜 올렸다. 이런 사례는 고창 선운사 대웅전, 김천 직지사 대웅전 등에서 볼 수 있다. 공포 짜임에 있어서 첨차는 대첨차, 중첨차, 소첨차를 모두 사용한 특징이 보인다. 내외 1출목에 중첨을 쓴 것이다. 선운사 대웅보전, 영국사 대응전 등에서도 같은 방식이 보이지만 역시 흔한 수법은 아니다. 살미 형태는 가공 기법에 있어서 시기가 다른 부재가 혼용되어 창건 이후 수리를 거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극락보전의 3출목 이상 첨차를 배열한 방식, 외부 살미 하단의 초각, 내부 살미의 연봉 장식 등은 조선 중기 이후 다포 건축물에 보이는 특징으로 정리된다. 측면 2칸에 대응한 가구구조: 3본의 충량 사용 극락보전의 가구구조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중요한 요소는 측면 규모라 할 수 있다. 측면 2칸이면서 팔작집을 지으려다 보니 일반적인 상부가구 구성으론 대응이 쉽지 않았다. 이 문제는 충량을 협칸마다 3본씩 설치하는 방식으로 해결하였다. 어칸 전면 기둥과 내부 고주 사이를 대들보로 가로지르고 직각 방향으로 충량을 3본씩 두어서 구조를 짠 것이다. 이렇게 충량 3본을 대들보에 걸친 이유는 외기도리 구성에 있다. 측면 3칸이었다면 자연스럽게 외기도리가 형성되는 구조이고, 측면 2칸인 다른 불전도 충량을 1본만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극락보전은 측면 주칸이 긴 편이어서 충량을 보조로 설치하여 외기를 구성하여 추녀에 걸리는 하중을 감당하려는 의도로 추측된다. 건립 당시 창호기법을 간직한 불전 극락보전의 창호는 일반적인 조선후기 불전 창호와는 차별성이 보인다. 전면은 창호는 문얼굴을 4분할하여 가운데 두 짝은 여닫이를, 문설주로 분리된 좌우 한칸은 하부에 머름을 두고 외짝 여닫이를 설치한 방식인데 부석사 무량수전을 비롯하여 맹씨행단 등 고식 기법과 상통한다. 배면 창호는 이른바 영쌍창으로 분류되는 방식으로 쌍여닫이창의 중간에 설주를 세운 형태를 가리킨다. 중간설주는 조선중기 이전에 널리 쓰인 창호 부재의 하나이다. 지금도 예천 야옹정, 상주 양진당 등 영남지방의 16세기 건물에서 널리 찾아 볼 수 있으며 대전 동춘당이나 예산 추사고택 등 17세기 이후 호서 지방에서도 드물게 확인된다. 전면, 배면의 창호는 모두 비교적 고식기법으로 제작되었는데 1996년에 수리공사를 추진하면서 잔존하던 흔적(홈 등)을 통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회복한 것이다. 건립 당시에 제작한 창호는 아니지만 근래 뚜렷한 근거를 토대로 창호의 원형을 되살렸다는 점에서 극락보전의 건립시기에 걸 맞는 외관을 보여준다. 지정가치 및 근거 비암사는 사료는 부족하지만 국보 1점, 보물 2점, 유형문화재 4점이 남아있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17세기에 들어서는 문인들의 활동은 물론 수화승 신겸이 그린 (1657) 등을 통해 충남지역에서 종교활동이 활발한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극락보전은 비암사의 주불전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단층 팔작집이다. 측면 2칸형 불전은 양란 이후에 널리 건립된 유형 가운데 하나로 대체로 17세기 이후에 건립되는 추세를 보여주는데 극락보전 역시 이런 흐름 속에서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공포는 양란 전후의 형식이 혼재된 면은 있으나 전반적으로 17세기 중엽 공포 짜임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례에 속한다. 특히 가구구조는 측면 2칸이면서 간살을 넓게 잡아 구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충량을 3본 사용하여 해결한 독특한 기법을 보여준다. 비암사 극락보전은 17세기 중엽 지방 사찰 불전의 시대특성과 지역색을 잘 간직한 점에서 국가지정문화재로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판단된다.
저작물 설명비암사는 마곡사의 말사로 현재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에 위치하고 있다. 비암사(碑岩寺)는 통일신라 도선(道詵)국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오고 그 외에도 여러 창건설이 있으나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비암사 출토 유물(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癸酉銘全氏阿彌陀佛碑像, 국보, 673년 제작추정) 이나 기축명아미타불비상(己丑銘阿彌陀佛碑像, 보물, 689년 제작추정)이 확인되었고, 지금까지 이 고장에서는 비암사를 ‘삼한고찰(三韓古刹)’로 부르고 있어 이 사찰의 창건을 고대로 거슬러 볼 수 있다. 17세기 전란 뒤의 시대상이 반영된 측면 2칸형 불전 조선시대 다포계 불전의 평면은 정면 3칸×측면 3칸형이 주류를 이룬 데 비해서 비암사 극락보전은 측면 2칸형 불전이다. 측면 2칸형 불전은 3칸×3칸 불전에 비해서는 사례가 적지만 임진왜란 이후 급속도로 보급되어 3칸×3칸에 이어 두 번째 비율로 남아 있다. 또한 고주를 뒤로 물려 설치하고 후불벽을 세워 전면의 예불공간을 확보한 방식에 있어서는 3칸×3칸 불전과 다름없지만 측면 1칸을 축소하였기 때문에 전면 예불공간이 협소하다. 이처럼 비암사 극락보전의 측면 2칸형은 전란 이후의 사찰경제가 축소된 시대상이 반영된 계획임을 알 수 있다. 그러면서도 내부는 고주와 후불벽을 설치한 방식을 고수하고, 분포면에서도 충남·세종시에 각각 1채만 남아 있어 지역에서도 흔치 않은 사례로 손꼽힌다. 17세기 공포구성의 사례 공포는 내외 3출목으로 구성하였다. 보통 조선중기에 들면 내외 출목수에 변화가 일어나서 내부 출목이 외부보다 늘어나는 경향이 나타난다. 게다가 측면 2칸형 불전 사례를 봐도 팔작집은 일반적인 출목수 변화를 따라 내부 출목수가 늘어나는 반면 극락보전은 내외 출목을 동일하게 짜 올렸다. 이런 사례는 고창 선운사 대웅전, 김천 직지사 대웅전 등에서 볼 수 있다. 공포 짜임에 있어서 첨차는 대첨차, 중첨차, 소첨차를 모두 사용한 특징이 보인다. 내외 1출목에 중첨을 쓴 것이다. 선운사 대웅보전, 영국사 대응전 등에서도 같은 방식이 보이지만 역시 흔한 수법은 아니다. 살미 형태는 가공 기법에 있어서 시기가 다른 부재가 혼용되어 창건 이후 수리를 거쳤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극락보전의 3출목 이상 첨차를 배열한 방식, 외부 살미 하단의 초각, 내부 살미의 연봉 장식 등은 조선 중기 이후 다포 건축물에 보이는 특징으로 정리된다. 측면 2칸에 대응한 가구구조: 3본의 충량 사용 극락보전의 가구구조에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친 중요한 요소는 측면 규모라 할 수 있다. 측면 2칸이면서 팔작집을 지으려다 보니 일반적인 상부가구 구성으론 대응이 쉽지 않았다. 이 문제는 충량을 협칸마다 3본씩 설치하는 방식으로 해결하였다. 어칸 전면 기둥과 내부 고주 사이를 대들보로 가로지르고 직각 방향으로 충량을 3본씩 두어서 구조를 짠 것이다. 이렇게 충량 3본을 대들보에 걸친 이유는 외기도리 구성에 있다. 측면 3칸이었다면 자연스럽게 외기도리가 형성되는 구조이고, 측면 2칸인 다른 불전도 충량을 1본만 사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극락보전은 측면 주칸이 긴 편이어서 충량을 보조로 설치하여 외기를 구성하여 추녀에 걸리는 하중을 감당하려는 의도로 추측된다. 건립 당시 창호기법을 간직한 불전 극락보전의 창호는 일반적인 조선후기 불전 창호와는 차별성이 보인다. 전면은 창호는 문얼굴을 4분할하여 가운데 두 짝은 여닫이를, 문설주로 분리된 좌우 한칸은 하부에 머름을 두고 외짝 여닫이를 설치한 방식인데 부석사 무량수전을 비롯하여 맹씨행단 등 고식 기법과 상통한다. 배면 창호는 이른바 영쌍창으로 분류되는 방식으로 쌍여닫이창의 중간에 설주를 세운 형태를 가리킨다. 중간설주는 조선중기 이전에 널리 쓰인 창호 부재의 하나이다. 지금도 예천 야옹정, 상주 양진당 등 영남지방의 16세기 건물에서 널리 찾아 볼 수 있으며 대전 동춘당이나 예산 추사고택 등 17세기 이후 호서 지방에서도 드물게 확인된다. 전면, 배면의 창호는 모두 비교적 고식기법으로 제작되었는데 1996년에 수리공사를 추진하면서 잔존하던 흔적(홈 등)을 통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회복한 것이다. 건립 당시에 제작한 창호는 아니지만 근래 뚜렷한 근거를 토대로 창호의 원형을 되살렸다는 점에서 극락보전의 건립시기에 걸 맞는 외관을 보여준다. 지정가치 및 근거 비암사는 사료는 부족하지만 국보 1점, 보물 2점, 유형문화재 4점이 남아있는 유서 깊은 사찰이다. 17세기에 들어서는 문인들의 활동은 물론 수화승 신겸이 그린 <영산회괘불도>(1657) 등을 통해 충남지역에서 종교활동이 활발한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극락보전은 비암사의 주불전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단층 팔작집이다. 측면 2칸형 불전은 양란 이후에 널리 건립된 유형 가운데 하나로 대체로 17세기 이후에 건립되는 추세를 보여주는데 극락보전 역시 이런 흐름 속에서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공포는 양란 전후의 형식이 혼재된 면은 있으나 전반적으로 17세기 중엽 공포 짜임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사례에 속한다. 특히 가구구조는 측면 2칸이면서 간살을 넓게 잡아 구조적으로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충량을 3본 사용하여 해결한 독특한 기법을 보여준다. 비암사 극락보전은 17세기 중엽 지방 사찰 불전의 시대특성과 지역색을 잘 간직한 점에서 국가지정문화재로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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